재벌아들의 이혼소송에서 대승(大勝)을 한 정금자 변호사(김혜수). 그녀에게 새 의뢰인이 찾아왔다.
정금자 말은 120% 맞다. 법적인 일에서는 항상 문서가 기준이 된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서로 중구난방으로 말로 주고 받았던 바를 정제하고 결론내려 최종적으로 글로 완성한 결과물이 계약서 같은 문서이기 때문이다. 계약서는 당사자들의 합의가 담긴 엑기스다.
그래서 변호사는 반드시 근거가 되는 계약서를 직접 보고서 자문을 해주어야 한다. 계약서가 있는 경우, 변호사가 하는 소송업무나 자문업무는 거의 항상 계약서를 해석하는 데서부터 출발한다. 아무리 의뢰인이 자세하게 설명해준다고 하더라도 계약서를 가져오지 않았다면, 변호사가 제대로된 자문을 하기 어렵다.
변호사를 찾아가 상담을 받을 때는, 가장 먼저 계약서나 각서, 영수증, 합의서 같은 모든 문서를 챙겨가는 게 좋다. 시간순서대로 정렬해서 인덱스를 붙여 각 문서가 어떤 건지 짧은 설명까지 붙여주면 (일하는 입장에서) 더 좋고. 이런 의뢰인과는 일하기도 편하고 커뮤니케이션하기도 훨씬 쉽다. 사건에서 이길 확률도 확 높아지고.
한편, 윤희재(주지훈)가 일하는 송&김 사무실에서는,
로펌 비서들은 본인이 담당하는 변호사에 관해서 굉장히 많은 걸 알고 있다. 출퇴근 시각, 오늘 누구랑 점심을 먹는지, 회사 안에서 어느 변호사와 친한지, 회사 내 평판 · 가족관계 · 씀씀이는 어떤지, 자주 가는 미용실은 어디고 어제 저녁으로 뭘 먹었는지까지.
담당 비서들은 변호사의 이메일 화면을 실시간으로 볼 수 있다. 변호사가 회사 안팎으로 주고 받는 메일을 계속적으로 체크하는 게 비서의 할 일이다. 그래야 변호사의 스케줄이나 업무 흐름을 파악하고 거기에 대처해서 비서 자신의 일을 할 수 있다.
변호사가 메일로 친한 변호사들과 점심 약속을 잡거나, 어젯밤 퇴근 전에 마지막 메일을 보냈거나, 상사로부터 꾸지람 듣는 메일을 받았다면, 그 메일을 다 보고 있는 비서는 담당 변호사의 인간관계, 평판, 퇴근 시각, 오늘 점심 메뉴까지 다 알게 된다.
게다가 변호사 방과 비서의 자리는 매우 가깝기 때문에 가끔은 방문을 닫고 통화해도 변호사의 통화소리가 비서에게까지 다 들린다. 그러면 비서는 오늘 변호사 기분이 어떤지, 가족과는 사이가 좋은지 나쁜지, 애인이 있는지 없는지, 미용실이나 병원을 얼마나 자주 예약하는지 다 아는 거지, 뭐.
또 다른 계기는 비서가 변호사의 법인카드 내역이나 영수증을 본다는 것이다. 로펌에서는 변호사들에게 식대를 지원해주고 그 비용 정산 업무를 비서에게 맡긴다. 법인카드 내역이나 영수증을 보면, 언제 어디에서 무슨 메뉴를 먹었는지, 술을 어디서 얼마나 마시는지 당연히 다 나오겠죠?
편의점에서 컵라면만 사야 하는데, 치약까지 사고 로펌에 식대를 청구한다든가, 밥을 안사먹고 생닭이나 시금치 한 단을 샀다든가, 해도 비서들은 다 알게 된다. 비서가 (어떤 이유로든) 담당하는 변호사에게 충성심이 없으면 다른 친한 비서들에게 그 변호사 흉을 볼 수도 있고, 그러면 '뫄뫄 변호사가 치약을 샀대~' 하는 소문은 회사에 퍼지게 된다.
그래서 변호사들은 자기 비서에게 평소에 잘 해야 한다. 꼭 치약이나 생닭이나 시금치를 사는 경우가 아니라도, 그냥 일상적으로 변호사의 시시콜콜한 모든 것이 비서에게 노출되기 때문이다. 비서에게 잘할수록 비서가 나에게 충성할 가능성도 높아지고, 나에 대한 소문이 돌 가능성도 적어진다.
윤희재의 최애 아티스트가 누군지를, 윤희재를 오래 담당해왔다면 비서는 쉽게 알 수 있다. 비서는 윤희재의 티켓 예매 메일을 봤을 수도, 윤희재 대신 티켓 예매를 해주었을 수도, 윤희재 방에서 아티스트의 음반을 자주 봤을 수도 있다. 그 비서가 친한 비서에게 이걸 말하고, 비서들 사이에서 소문이 돌고, 부현아 변호사의 비서가 이걸 부현아에게 전달하면, 부현아는 '고이만'의 티켓이 생겼을 때 윤희재를 떠올리게 되는 거다.
이렇게 윤희재는, 정금자가 고이만의 변호사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다음날 정금자는 고이만의 매니지먼트 계약서를 검토한 후 고이만을 다시 찾아가는데...
계약서를 썼다고 해서, 그 계약이 다 유효한 것은 아니다. 반사회적인 계약이나 한 쪽에만 현저하게 불공정한 계약은 무효다(민법 제103, 104조). 예를 들어 유키스의 케빈이 소속사와 체결했던 전속계약은, 지나치게 아티스트의 자유를 제약하기 때문에 무효인 대표적인 계약이다.
유키스의 계약 내용은, 케빈은 소속사가 요구하는 모든 연예 활동을 10년 이상 다 해야 하는데 (거부할 수 없음), 정작 방송출연과 음원에서 나오는 수익 대부분은 소속사가 가져가고 케빈은 음원 수익의 10%만 가져간다는 내용이었다. 이 계약에 따르면 만약 케빈이 수익을 내지 못하면 소속사는 일방적으로 전속계약을 해지할 수 있었지만, 케빈은 계약을 해지하려면 <위약벌 1억+투자금의 3배 금액+앞으로의 예상이익금의 2배>를 소속사에 배상해야 했다. (진짜 노예계약이네예...)
'하이에나'에서 고이만은 엄마가 대표이사로 있는 매니지먼트 사와 '15년 전속계약, 연애 금지, SNS 금지, 엄마가 짜주는 스케줄 준수, 월급 500만 원'인 매니지먼트 계약을 맺었다. 연애나 SNS를 금지하는 건 뭐 거의 사람의 인격을 무시하는 것이다. 게다가 전속계약 기간이 너무 길고, 그 긴 기간 동안 스케줄의 자유도 없고, 월급도 본인이 버는 것에 비해 지나치게 적다. 유키스 계약이 무효였듯이, 고이만의 매니지먼트 계약도 반사회적인 계약으로서 무효다.
그럼 사람들은 이런 불공정한 계약을 대체 왜 체결하는가? 갑을 관계에서 오는 권력 차 때문이다.
고이만은 어리숙하고 세상 물정 모르는 캐릭터다. 어렸을 때부터 음악만 해왔을 뿐으로, 엄마의 과보호 및 정서적인 학대 때문에 어른으로 성장하지 못했다. 사회 경험이 없는데다 계속적으로 엄마에게 위축되어 있었기 때문에, 엄마(매니지먼트 사, 甲)에게 대항하지 못하고 이런 불공정한 매니지먼트 계약을 체결하게 되었다(乙).
바로 이런 경우 고이만 같은 사람을 구제하기 위해서 불공정한 계약을 무효로 돌리는 것이다. 어쨌거나 정신을 조금 차린 듯한 고이만은, 엄마(매니지먼트 사)를 상대로 소를 제기하기로 했다. 이 계약이 판결로써 무효로 확인되면, 고이만은 연애도, SNS도, 스케줄도 자기 맘대로 다 하더라도 매니지먼트 사에 손해배상을 하지 않아도 된다.
과연 고이만은 엄마를 이기고 자기 인생을 찾아갈 수 있을까? 다음 편에 계속.
(사진 출처는 넷플릭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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